2009년 1월 9일

기술(技術)보다는 덕(德), 덕보다는 시리(時利)

제가 5년 전에 ZDNET에 썼던 글을 어떤 블로거가 게시해 놓았더군요. 제가 쓴 글이지만 5년 만에 보니 좀 생소하네요. 그리고 속상하네요.

그때 안다고 생각한 것이, 충분히 아는 것이 아니었네요. 그렇다면, 지금 안다고 생각하는 것도 그렇겠죠? 스스로에게 실망스러운 부분이 있지만, 그래도 깨우치고 실천하고 성취할 때까지 끝까지 가볼 것을 다짐해 봅니다.

그런 다짐조차 없어지면, 그때 저는 산송장이 된 것이죠.

기술(技術)보다는 덕(德), 덕보다는 시리(時利)

예전에는 알고 있었으나, 지금은 연락이 안 되는 지인이 한 명 있다. 그는 한때 유명 대기업의 고참 엔지니어였는데, 똑똑하고 샤프했으며 문제점을 발견하고 그것을 어필하는 능력도 있어서 회사에서 꽤 인정을 받고 있었다. 그는 자기가 맡은 바 책임을 언제나 잘 해내었고, 프레젠테이션 능력도 탁월한 전문가였다.

그런 그에게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타인들에 대한 배려가 부족하다는 것이었다. 프로젝트의 핵심적인 인물이었던 그는, 프로젝트 진행 중에 발생하는 여러 문제점 또는 미비한 점에 대해 관련된 부서 또는 동료, 부하 직원들에게 신랄한 지적을 하기 일쑤였다. 물론 그의 주장은 합리적이고 이치에 맞기는 했다. 어차피 업무적인 이해관계에 기반하여 지적을 하는 것이기에, 똑똑한 그의 주장이 틀릴 리 만무했다.

그리고 그런 지적을 받은 사람들도 그의 합리적이고 똑똑한 주장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었으며, 설사 마음속으로는 동의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그의 주장을 반박할 논거가 없기에 그냥 입을 닫을 수밖에 없었다. 주변 사람들 모두 그의 기술적 능력을 인정했다. 하지만 그와 함께 일하는 것은 왠지 꺼렸다. 그와 함께 일할 때의 불편한 감정, 아무도 그것을 원하지 않았다. 그래도 그는 회사에서 승승장구 하는 듯이 보였고, 언젠가 필자에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회사 사람들이 너무 직업의식이 없어. 전문적인 지식도 부족하고, 일도 너무 멍청하게 하는 거 같아. 내가 최대한 성과를 내면 100은 자신 있는데, 사람들에게 발목이 잡혀 50밖에 못한 단 말이야."

그런 말을 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모바일 관련 사업을 한다며 회사를 그만 두었다. 그의 사업은 초기에는 그럭저럭 잘되는 것처럼 보였다. 아이템도 훌륭했으며, 멋진 프레젠테이션을 통해 어느 정도의 자금도 유치했으며, 무엇보다도 그는 정말 개인적으로는 능력이 있었다. 하지만 사업을 시작한지 1년 정도 지났을 때 그는 필자에게 이런 어려움을 토로하였다.

"나는 밤새워 일을 하는 데, 부하 직원들이 너무 일을 안 해. 그리고 거래 기업들도 부도덕한 요구를 많이 하고, 나는 약속을 지키려고 노력하는 데 그쪽은 그렇지 않고.."

그리고 그는 사업 개시 2년을 막 넘겼을 때 사업을 정리하였으며, 지금은 잠수 중이라서 소식을 알 수 없다. 여기에서 그의 실명을 밝히지는 않았지만 그의 이야기를 이렇게 공개적으로 할 수 있는 것은, 마지막으로 그를 만났을 때 칼럼의 소재로서 동의를 구하였고 그가 필자에게 그것을 허락하였기 때문이다. 그가 어떤 아이템의 사업을 했고, 그때의 시장 상황이 어땠고, 자금에 어떤 문제가 있었고, 부하 직원이나 거래 업체가 어떤 부도덕한 행위를 했는가? 하는 것은 이 이야기의 본질이 아니다.

옛 성현의 말씀에 "기술(技術)보다는 덕(德), 덕보다는 시리(時利)"라는 명언이 있다. 어렸을 때 필자가 아버지로부터 가끔 들었던 이 말은, 사회생활을 5년 넘게 하면서까지도 머리 속으로는 알면서도 가슴으로는 잘 와 닿지 않았다. 하지만 사회생활 10년이 된 지금에 와서는, 그 말을 가슴을 베이듯이 느끼고 있다.

솔직히 고백하건대, 과거에 필자 또한 위에 언급한 지인과 경우는 좀 다르지만 본질적으로는 동일한 경험을 한 적이 있다. 내가 많이 알고 있고 내 의견이 옳다고 생각하면, 그것은 곧 타인은 나보다 적게 알고 타인의 의견은 틀렸다는 생각을 은연중에 갖게 한다. 하지만 그건 바람직한 일이 아니며, 무엇을 성취하는데 있어 커다란 장애가 된다. 인간이란 마법과도 같은 능력이 있어서, 타인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고 평가하고 있는 지에 대해 인지할 수 있다. 구체적으로는 알 수 없는 법이지만, 마음의 느낌을 갖는 것이다.

자신의 의견을 명확히 주장하면서도 남을 폄하하지 않는 것. 그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다. 또한 사회적 지위가 상승할수록 그 대상은 점점 넓어지고 그 파장도 더 커지고, 덕이 있게 행동하는 것은 더욱 어려워진다. 마지막으로 그를 만났을 때 이런 종류의 얘기를 하며, 비슷한 공감대를 형성했던 기억이 난다. 그 또한 뼈저린 경험을 통하여 무엇이 문제인지 어느 정도 느끼고 있었다. 진정으로 똑똑한 사람은 자신의 문제점을 인지하고 유사한 시행착오를 반복하지 않는다.

'덕(德)'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한마디로 정의하기는 어려운 단어이다. 그리고 디지털 시대에 덕에 대해서 얘기한다는 것이 어쩌면 구닥다리같이 느껴질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가 언제나 아쉬워하는 바로 그것이다. 덕은 현명함이며, 포용력이며, 타인에 대한 깊은 배려이며, 세상 만물의 돌아가는 이치를 깨닫고 있는 것이다.

'시리(時利)'는 우리가 흔히 타이밍(timing)이라고 얘기하는 것인데, 그 외에도 운, 기회, 운명 등 여러 가지 뜻으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분명 시리는 개인적 노력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덕이 있는 사람에게는, 어느 순간에 분명히 그 혜택이 돌아간다.

가끔 덕이 없는 사람이 성공하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그것은 단지 성공한 것처럼 보이는 것뿐이다. 진정한 성공이란 5년, 10년, 그 이상을 가는 것으로서, 주변 사람들 또는 공공의 신뢰와 인정 하에 존재하는 것이다. 덕이 없는 사람의 성공은 대부분 통속적인 것으로서, 주변사람들의 신뢰와 존경심을 유발하지 못하며 또한 오래갈 수도 없다. 금전적 가치, 사회적 지위가 모든 것을 해결해주는 세상이기는 하지만, 사람들 마음 속 깊은 곳으로부터의 신뢰와 존경심은 언제까지나 금전으로 해결될 수 없으며 또한 그래서도 안 될 것이다.

필자가 덕이 많아서 이러한 얘기를 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아니 오히려 형편없이 부족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나마 다행스러운 것은, 이제 무엇이 더 중요한지에 대해서는 깨닫고 있다는 것이다. 앞으로도 필자는 기술과 능력의 향상을 위해 꾸준히 정진할 것이고 언젠가 어느 위치에 도달하는 것이 분명히 가능할 것이라고 믿지만, 과연 스스로 덕이 있는 사람이 될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자신이 없다.

이 세상에서 누군가 성공해야 한다면, 지식과 능력을 갖춘 사람보다는 덕이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야 그 사람의 성공을 통하여 많은 사람들이 혜택을 받을 수 있고, 세상이 좀 더 아름답고 풍요로워진다. 진정한 리더십이 아쉬운 이 시대에, 덕이 있는 사람들이 많이 출현하기를 기원해 본다. 하늘은 덕이 있는 사람을 도울 것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지식 모두는 우리의 무지를 깨닫게 해준다." - 영국 시인 T.S. 엘리엇 @

댓글 5개:

ProductionKim :

짝짝짝짝 멋진 글이옵나이다.~~

익명 :

왜 지금의 대통령이 가장 먼저 떠오를까요^^;

익명 :

이 글을 읽고 난 후에 최인호님의 '산중일기'를 읽었는데요. 이런 말이 나옵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벗을 사귀고 또한 남에게 봉사한다. 오늘 당장의 이익을 생각하지 않는 그런 벗을 만나기 어렵다"

덕이 있는 사람은 이런 사람들과는 조금 다를거란 생각이 드네요.

익명 :

아...
아침에 너무 좋은 글을 읽었습니다.

고맙습니다.

익명 :

진부한 현자들의 말씀이나 류한석님의 진솔함과 경험이 버무려져 잔잔한 감동을 주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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